[펌] R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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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다름없이 배달할 물건을 싣고 도시의 작은 거리, 근교의 숲길을 달리는 로먼.
그는 13세의 소년가장으로 밑으로 카톨릭 세례명을 받은 두 동생 미카엘과 가브리엘이 있다.
도시의 겨울은 매서웠고, 어린 동생들은 추위에 떨며 로먼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별거 아닌 음식으로 겨우 허기를 ?우고,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을 잊기 위해 아이들은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
으시시한 새벽이 올랴치면 동이 트기 전에 로먼은 일어나야 한다. 평화로이 잠든 두 어린 동생을 깨우지 않으려 조심하며, 가브리엘과 미카엘에게 제 몫의 이불까지 챙겨 꼭 덮어주며 신문과 우유배달을 하러 자전거를 끌고 어두운 거리로 나서는 로먼. 간간히 불을 밝히는 가로수등 사이로 아직 다 녹지 않은 눈길을 미끄러지며 로먼은 캄캄한 거리를 자전거로 달린다.
1월 중순이 되어 학교가 개강하자 미카엘은 성당 기숙학교로 들어간다. 추운 다락방에 큰 형과 누이동생만 남겨두고 가는 심정이 착잡하나 그를 배웅하는 로먼과 가브리엘 표정은 희망을 가득 담고 있다. 로먼이 나가 있는 동안 가사일은 도맡아 했던 미카엘은, 가브리엘에게 자기를 도왔던 대로 똑같이 형을 챙겨주라고 일러주지만 막상, 호기심많은 가브리엘이 거리에서 아이쇼핑을 하며, 성당등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들으며 부러움에 젖어 어깨 축 늘어진 채 돌아오면 그녀를 위해 따뜻한 저녁을 준비해 놓고 있는 건, 항상 따뜻하게 미소지어주는 로먼이었다. 매주 일요일이 되면 로먼은가브리엘을 데리고 레겐스부르크 대성당으로 미사를 드리러 가곤 했다. 가브리엘에겐 가장 신나는 때가 이 때였다. 미카엘과 만날 수 있고, 음악을 접할 수 있고, 미카엘 너머로 음악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봄이 오고 있었다. 미카엘은 부활절 칸타타 공연에 와 준 로먼과 가브리엘과 어울려 공연 후의 피크닉을 즐겼다. 신록이 아름다운 계절의 여왕 5월, 로먼은 일을 마치고 이따금씩 도나우강에서 홀로 보트를 저으며 산책을 하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어린 누이 가브리엘을 태우고 레겐강이나 도나우 강을 누비는 일이 많았다. 미카엘이 성가대 활동으로 바쁘기 때문에 가브리엘과 놀아주는 건 그의 몫이었다.
숲 속으로 놀러갔다. 어린 가브리엘은 다람쥐, 나비, 이따금씩개, 고양이들을 좇으며 뛰어가는 그 숲길을 로먼은 천천히 그녀를 따르며 걷고 있다. 그는 더 이상, 먹고 살아야 할 힘든 현실을 (여기에 와서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미래의 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을 즐겼다. 그대로 꼭 이뤄지진 않을 거라도... 미래는 아이들의 특권이었고, 그는 그 희망을 아직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3000여명의 소년이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 모였다. 웅장한 대 합창이 성당곳곳에서 울려퍼졌고, 레겐스부르거 돔스파첸과 함께 로마에 온 로먼은 이 미사에서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다. 3000여명의 소년들이 한데 입을 모아 부른 미사 공연에서 유난히도 천사같이 아름답게 생긴 프랑스 소년이 독창을 맡아 불렀다. 미사 공연 후 로먼은 가브리엘과 같이 바티칸 성당을 거닐다가 우연히 베아트리체와 마주치게 된다. 신부인 오빠와 이야기 나누고 있던 밀라노 출신의 아름다운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신곡 베아트리체처럼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준 사람이 되었다.
꿈같이 흐르던 이태리에서의 여름이 지나고 다시 독일의 시골마을로 복귀했다. 다시 누추하고 힘든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이미 많은 경험을 하고 난 뒤라 쉽지 않았다. 다시 공립학교를 다니고 아침, 저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이젠 로먼은 그 동안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아트리체 생각을 했다. 그녀를 알게 되면서 그는 처음으로 그의 각박하고 초라하게만 느껴지던 인생이 풍부해져가는 행복한 삶의 느낌을 느꼈다. 가을의 숲을 거닐거나 보트로 미끄러지면서... 그는 그녀를 생각하고 다시금 그녀를 만날 날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가브리엘이 이상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잘 차려입은 어느 친절한 귀부인의 이야기였다. 처음엔 그러려니하고 웃으며 들었는데 항상 선물을 사들고 들어오고, 집에서 식사를 안 하는 게 거슬리기 아니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아니나다를까... 그가 일하는 가게 주인으로부터 조심스레 가브리엘을 양녀로 맡아 기르고 싶다는 레겐스부르크 귀족이 있단 소리를 듣게 되는데... 로먼은 거세게 반발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가브리엘에게 다시는 그 부인이 하자는대로 하지 말라고 약속시킨다.
단풍이 지고 낙엽이 흩날리고 있었다. 오늘도 베아트리체는 로먼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정성스레 준비하고 있었다. 곧 추워지는데 뜨개질을 해서 겨울에 덮을 뭔가라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낙엽 떨어지는 밀라노 거리를 창 밖으로 보며, 홀로 유유히 강가 주위로 화려한 두오모 사이를 산책하며... 문득 그녀는 여름에 만난 독일친구 로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분위기 좋은 데 앉아 그에게 엽서를 써보기도 하고, 적절한 詩를 찾기 위해 시집이나 성경을 뒤적여 보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만큼 로먼에게 가까이 갈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로먼과는 너무나 처지가 달라, 자칫하면 그녀의 애정이 동정과 연민으로 오해를 살 수 있었고 또 로먼은 그들의 영원한 적국 독일의 국민이었기에 그들이 서로에게 향하는 마음만큼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마음이 너무 아팠고, 외로움에 프랑스의 사촌 카를러스에게 밀라노를 방문해 달라는 편지를 보낸다.
오랜만에 들어간 집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항상 밝고 명랑하던 가브리엘이 웬지 의기소침해 있는 듯 보였다. 자기를 보고 너무 반가와 하는 게 로먼과 뜻밖의 불화관계에 있었던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로먼은 무척 힘이 없어 보였으나 미카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가족의 일원인 만큼... 미카엘은 기숙학교로 출발하기 전날 밤, 로먼에게서 겨우 모든 전말을 전해듣게 된다. 가브리엘을 사이에 두고 두 오빠들은 그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녀의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몰라 끙끙 앓고 있었다. 가족이 우선인가, 그녀의 인생이 무얼 더 원하게 될 것인가를 두고... 로먼은 너무나 힘들어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계속 우울하게만 지내던 가브리엘이 아프기 시작하는데...
로먼의 편지가 도착했을 때 로먼이 너무나 힘들어 그녀에게 의지하 듯 써내려간 편지를 읽고 베아트리체는 그가 있는 곳으로 가보기로 한다. 밀라노에서 내린열차가 레겐스부르크 역에 도착했을 때 도시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다들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들떠 있는 눈 내리는 작은 마을에... 그러나 로먼의 집에선 가브리엘이 고열로 시달리고, 로먼은 며칠 째 일도 못 나가고 있었다. 너무나 비참한 상황이었다. 로먼도 이젠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숨길 수 없었고, 베아트리체는 겨우 로먼을 달래 일터로 보내고 그녀를 따라온 사촌 카를러스와 함께 가브리엘을 돌보기 시작한다.
사실 베아트리체는 가브리엘도 가브리엘이지만 눈에 띄게 수척해진 로먼이 더 걱정이었다. 육체적으로 더 항상 힘들었던 건 로먼일텐데 누이동생의 고열이라는 정신적 고통까지 안고 있으니... 게다가 그의 비밀스런 고백에 의하면 가브리엘을 어떤 귀부인이 원하고 있으며 어린 동생도 그 귀부인을 엄청 따르고, 게다가 음악 때문에 그 귀족 생활을 무척 좋아하고 그리워하고 있다고 하니...
너무나 독립적이고 헌신적인 로먼에게...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삶, 도움도 받을 줄 아는 삶을 살아야한다고 거듭 강조하는 베아트리체...
겨우 열이 내려 잠에 든 가브리엘의 옆을 지키며 하루 종일 일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도 끝까지 누이 곁을 떠나지 않으며 그 철쇠같은 마음을 못 이겨 눈물을 흘리는 로먼의 모습을 보았을 때, 독일에 마음의 벽을 두르고 있던 카를러스도 가슴이 미어지 듯 아파왔다. 밤중의 불빛이 의아해서 찾아온 카를러스에게 로먼은 너무나 약한 소릴 했다. 모든 지 강하게 견디고 잘 꾸려갈 것만 같았던 그도 정말 인간적인 약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브리엘 행복을 막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며 분명 이런 때 그녀의 귀부인은 좋은 의사에 좋은 약 다 대동하며 다 치료해 줄 텐데... 이렇게 힘들게 질질 끌지 않고 빨리 완쾌시켜 줄 텐데...
하지만 지금의 결별과 당장의 편안함이 치루게 될 나중의 혹독한 댓가를 피하기 위해 지금 이렇게 참아달라는 것이 자기 자신의 욕심이자 고집은 아니었는지.
어느 날 좀이나마 몸이 완쾌가 된 가브리엘을 레겐스부르크 숲으로 산책 데리고 나갔을 때... 그들은 눈 속에서 용케 싹을 틔운 흰 잎의 꽃을 발견했다. 어둠속에서 한 가닥 솟아나온 희망같은 느낌이 들었는지 가브리엘이 무척 그걸 갖고 싶어했다. 그러나 위험한 절벽 사이에 피어 있어 꽃을 따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같은 희망의 느낌을 받았던 터라 카를러스는 그녀를 위해 그 꽃을 따주는데... 그가 벤치에 앉아있는 그녀에게 그녀의 눈높이에 맞게 내려앉아 꺽은 꽃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을 때... 꽃을 소중하게 받아 쥐어든 어린 소녀는 정말 나이치고 수척한 가운데 있지만서도 어딘가 고귀한 데가 있었다...
그것은 카를러스에게 묘한 여운을 남겨주고 있었다.
그 해 겨울은 정말 잊을 수 없는 겨울이 될 것이다. 로먼이 겨우 해동을 시작한 물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베아트리체는 그 옆에 있었다. 물에 빠져버린 어린 아이를 보고 그가 고통스러워 하는 게 표정에 역력했다. 아마도 최악의 경우 자기 없이 남겨질 두 동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 아이의 고통스런 울음소리를 참지 못했다. 그래서 발만 동동 구르던 베아트리체가 어떻게 말릴 틈도 없이... 그는 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차가운 강물에 몸을 던져 강에 빠진 어린 아이를 구해낸 대신 자신은 며칠 동안 고통에 해메이다 결국은 그의 짧은 삶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가브리엘은 미카엘과 함께 고아신분으로 등록되었고, 그녀를 애타게 바라던 귀부인에게 양녀로 들어가게 되었다. 미카엘 역시 로먼처럼 반항하며 학교를 그만두고 그녀를 돌볼 기세였지만, 오히려 그녀가 로먼의 죽음을 견뎌내 듯 이 상황을 참을성 있게 받아들였다. 사실... 귀부인의 물질적 정신적 배려에 끌렸던 게 아니었다. 그녀에겐 가족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그녀가 없었으면 로먼이 그렇게 고생하며 살지 않을 수있었으리란 게 그녀 인생을 두고 항상 어린 그녀를 억누르던 짐이었다. 그녀는 이 심정을 감히 말로 가족들에게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미카엘마저 앞날 창창한 그의 인생마저 빼앗을 순 없었다. 로먼만 해도 너무나 견디기 힘든 마음의 가책으로 남아 있는데.
친절한 레겐스부르크 성주는 미카엘이 매주 가브리엘에게 놀러와 주말을 보낼 수 있게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미카엘의 성가대는 성주의 궁전에서 쳄버 콘서트를 갖기도 하였다. 가브리엘과 미카엘은 지난 힘든 세월은 잊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정원에서 지난 날의 힘든 과거를 보상받 듯 평화롭게 뛰놀았다.
그러나 그 세월은 오래 가지 못했다. 레겐스부르크 성주 가족은 가브리엘을 데리고 너무나도 멀고 먼 이국 땅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생 이별을 당하게 되고, 가브리엘은 성인이 되어 다시 유럽으로 돌아오기까지 낯선 땅에서 외로운 청춘시절을 보내게 되었다.